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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 먼저 읽는 한국사ㅣ 019. 조선시대 ② 태조에서 태종까지 ★★
1. 태조
왕이 될 천운
태조는 점을 잘 보는 무학대사를 만나게 됩니다. 무학대사는 자신을 찾아온 이성계를 보고 장차 국왕이 될 사람이라 했다고 합니다. 어느날 이성계는 불이 나 허물어진 집에서 세 개의 서까래를 짊어지고 나오는 꿈을 꾸었는데, 무학대사가 이를 풀이하면서 세 개의 서까래는 王자와 같으니, 왕이 될 것이라 했다고 합니다. 이야기 외에도 이성계가 왕이 될 여러가지 천운들이 <태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죠.
국호의 결정과 한양천도
1392년 7월 수창궁에서 왕으로 즉위한 후 이성계는 처음에는 국호를 그대로 고려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1392년 11월 국호를 새롭게 정하는 과정에서 논의 끝에 '조선'과 '화령'으로 국명후보를 압축한 후 명에 보냈고, 명에서는 '조선'을 택합니다. 이듬해인 1393년 2월 정식적으로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었죠. 한편 명은 조선의 국호 결정에 동참하면서도, 이성계를 조선의 정식 국왕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임시왕'이란 뜻의 권지국사(權知國事)라 부릅니다. 조선의 국왕이 정식으로 인정 된 것은 태종이 즉위한 이후입니다.
이성계는 무학대사와 정도전 등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새로운 수도로 천도할 것을 계획합니다. 여러후보지역들 중 명당이라 평가된 한양에 새로운 궁궐 공사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1394년에 천도를 단행합니다. 이로써 고려의 그늘에서 벗어났죠. 이 한양을 설계하고 각 건물의 이름과 시내의 이름을 지은 이가 바로 정도전입니다.
왕씨 세력 제거
태조는 즉위 후에 초기에는 온건한 방법으로 고려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합니다. 고려 왕실 사람들을 제거하지 않고 강화도와 거제에 분산시켜 살도록 하였습니다. 새로운 왕조가 세워졌음에도 고려 왕실에 대한 제사를 허용하기까지 하였죠. 그러나 신하들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고려왕실 지우기 작업에 착수합니다. 왕씨 세력을 찾아내 제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왕씨의 후손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제1, 2차 왕자의 난
태조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한명은 자신이 변방의 무인으로 있을 때 혼인한 한씨와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혼인한 강씨입니다. 이성계는 한씨(신의왕후)에게서 6명의 아들(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을 얻었고, 강씨(신덕왕후)에게서 2명의 아들(방번, 방석)을 얻었습니다.한씨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1391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왕비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였죠. 이로써 조선의 왕비는 두번째 부인 강씨가 차지하였습니다.
한편 조선의 킹메이커라 자처한 정도전은 왕실의 정치 개입을 견제하고 재상 중심의 국가 운영을 추구하였는데, 이때 국왕의 역할은 훌륭한 재상을 잘 뽑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가장 잘 실천할 인물로 막내 아들 이방석을 다음 왕으로 점지해 둡니다. 이성계 역시 강씨를 매우 사랑했을 뿐더라 정치적 벗인 정도전의 의중도 수용하여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습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의 권력을 장악하고 조선의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 자식들은 바로 한씨의 아들들이었음에도 말이죠. 이러한 태조의 결정에 가장 큰 불만을 가진 이가 바로 한씨의 다섯 째 아들 이방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명나라가 정도전이 작성하여 명에 보낸 표전문을 문제삼으면서 정도전을 명에 압송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에 정도전은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대며 명으로 가는 것을 지연시키면서 오히려 요동을 공격할 계획을 세웁니다. 의흥삼군부를 설치하여 군사력을 정비하고 진법을 연구하고 이를 병사들에게 훈련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왕족들이 가지고 있던 사병들을 없애고 정규군으로 편입시키려 하였죠. 왕족들의 불만과 반발이 높아졌습니다. 이에 이방원은 형제들을 설득하여 1398년 8월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정도전 등의 일당을 제거하고 세자 이방석과 그의 형 이방번도 제거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무인년에 일어났나고 해서 '무인정사'라고도 하죠. 이로써 모든 권력은 이방원에게로 집중됩니다. 이제 방원이 세자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 깨고 방원은 자신의 둘째 형인 방과에게 세자 자리를 넘겼습니다. 태조는 왕자의 난 이후 방원에 대한 분노와 정치에 대한 염증으로 방과에게 왕위를 넘겼고, 1398년 9월 세자 방과가 조선 제2대 왕인 정종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정종은 즉위 후 정치적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등의 이유로 다시 개경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한편 이 무인정사 때 박포라는 인물은 정도전 일파의 행동을 알려주는 등의 공을 세웁니다. 그런데 논공행상 처우가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왕권에 야욕을 보이던 방간에게 접근하여 이방원을 제거할 것을 부추깁니다. 이에 동조한 이방간은 박포와 함께 군사를 일으킵니다. 이에 이방원도 군사를 일으키면서, 양측 군사는 개경 시내에서 맞붙었으나 이방원의 사병이 승리하여 이방간은 유배되고 박포는 참수되었습니다.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입니다.
2. 태종
이방원 즉위와 한양천도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이 승리하면서, 이방원의 반대 세력은 사라집니다. 난이 끝난 후 이방원의 최측근이었던 하륜은 정종에게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요청하죠. 정종은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약 9개월 후에 왕위를 넘겨줍니다. 이 9개월 동안 조선은 세자 방원의 주도하에 국옹 중심의 국가 운영 체제를 만들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선 군사권을 일원화 하여 사병을 혁파하고,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귀족(신권) 중심의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합니다. 또 승정원을 설치하여 왕명을 담당하게 하였죠. 그리고 1400년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 받아 왕위에 오릅니다.
강력한 왕권의 구축
왕위에 오른 태종은 먼저 아버지 태조를 태상왕으로 모시면서 효를 다하며 이성계를 궁으로 다시 돌아오게 만듭니다. 이성계는 다시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조건으로 다시 돌아왔죠. 태조를 돌아오게 함으로써 왕위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후계자를 일찍 지정해 왕실의 안정을 도모합니다.
제도적 차원에서도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하여, 의정부 아래 육조의 기능을 강화하고, 육조의 장관이 직접 왕에게 보고하게 하는 육조 직계제를 실시해 왕이 대부분의 국정을 처리하도록 하여 왕권을 강화시켰다.
★★ 소리로 복습하는 한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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