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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 고려시대 ⑤ 원 간섭기와 고려의 멸망

by 코택유 2023.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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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 먼저 읽는 한국사 017. 고려시대  ⑤ 원 간섭기와 고려의 멸망 


1. 원 간섭기의 시작과 권문세족의 성장

앞서 살펴 본 무신 정권 말기 정치 상황의 여러 변동들이 있을 때 몽골에서 쿠빌라이가 대칸 자리에 오릅니다. 그는 몽골제국의 이름을 원이라 바꾸었죠. 그리고 자기가 아릭부케와 경쟁 중이던 때 자신에게 항복하러 온 고려의 태자(제24대 원종)와 약속을 지키며 고려의 자주적 면모를 유지해 줍니다. 그러나 강화 조건 중 하나였던 개경 환도가 지연되고 무신 정권이 몽골에 끝까지 저항하자, 원은 고려에 압박을 가합니다. 고종의 뒤를 이은 원종은 속이타들어갔겠죠. 원종이 무신들과 힘겨루기를 하는 상황에서 몽골과 약속대로 태자(원종의 아들, 훗날 충렬왕)가 인질로 몽골에 갑니다.

1269년 태자(충렬왕)은 오랜 인질 생활을 끝내고 고려로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오던 도중 임연에 의해 원종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태자는 다시 몽골로 돌아가 임연을 칠 군사를 요청하면서 동시에 원 황실의 딸과 혼인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몽골의 칸은 자신이 임명한 고려의 왕을, 일개 무신이 폐위 시켰다는 것에 심기가 매우 불편하였습니다. 그래서 태자의 요청을 수용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원종을 복위 시키면서 몽골 황실과 고려 왕실의 결혼을 허락해줍니다. 이때 태자(충렬왕)은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하게 되면서, 고려는 원의 부마국(사위국가)으로 지위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곧 고려 왕의 권력은 몽골의 황실과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몽골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력질서가 만들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태자(충렬왕)은 원의 공주와 혼인 후 고려로 돌아오면서 몽골의 풍속을 수용해, 변발을 하고 호복을 입고 와 제25대 충렬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충렬왕은 관리들과 전국의 백성들에게까지 몽골의 풍속을 따를 것을 명하죠. 또 국내 정치에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직접 원에 가서 물어보거나 해명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에 왕의 시호가 원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충렬왕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고려는 원의 간섭을 받게 되었고, 충렬왕 이후부터 제30대 충혜왕때까지 78년 간 원의 간섭을 받았고, 이 기간 즉위한 왕들은 모두 원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시호에 충(忠)을 사용하였습니다.

원은 고려의 관제를 격하시키고 각종 공물을 강요하였습니다. 원과 교류가 늘고, 더욱이 원의 간섭이 심화되면서 원을 등에 업고 권력을 차지한 세력이 새롭게 등장합니다. 이들은 역관, 상인, 종래의 문벌, 무신세력 등 다양한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을 권문세족이라 부릅니다. 권문세족의 권력은 고려왕실과 마찬가지고 몽골 황실에서 나왔습니다. 대표적인 권문세족이 바로 기철입니다. 몽골은 고려에 공녀를 바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때 공녀로 끌려갔다가 원나라 황실의 황후가 된 인물이 기황후입니다. 이 기황후의 오라비가 바로 기철이었습니다. 기철은 원 황실을 등에 업고 막대한 권세를 누립니다. 기철로 대표되는 권문세족은 당시 가장 큰 정치기구인 도평의사사를 장악하여 국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고 갔으며, 경제적으로도 대토지를 차지한 후 대농장을 경영하였습니다. 그리고 막대한 권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백성들의 농민을 빼앗고, 어려운 농민들에게 쌀이나 돈을 빌려주고 만일 갚지 못하면 자신의 노비로 삼기도 하였죠.

권문세족의 힘이 강해지고 사회적 불안과 민심의 분노가 쌓여가자 충렬왕 이후 몇몇의 왕들은 이들의 폐단을 막기 위해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충렬왕은 권문세족이 독차지한 토지와 불법으로 만든 노비 문제를 해결하고자 임시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합니다. 그러나 큰 성과 없이 폐지됩니다. 참고로 이 전민변정도감은 원종 때 처음 실시되었다가 여러 차례 설치와 폐지가 반복되었는데, 가장 큰 성과를 거둔 것은 나중에 볼 공민왕 때 설치된 전민변정도감입니다. 충선왕은 사림원을 설치해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업무를 전담시켜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하였고, 권문세족의 폐단으로 어려워진 국가 재정을 다지고자 소금 전매제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왕실 내의 갈등과 권문세족의 반대 등에 부딪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2.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

그러던 중 1351년 고려 제31대 왕으로 즉위한 공민왕 때 이르러 성공적이 개혁이 시도됩니다. 시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민왕은 이전의 왕들과 다른 시호를 가지고 있죠. 공민왕은 즉위 하기 전 이전의 세자들이 그러하였듯이 몽골에서 10년 간 인질생활(숙위 생활이라고도 합니다.)을 하면서 원황실의 공주(노국대장공주)와 혼인을 합니다. 원에 머무는 동안 공민왕은 원의 국력이 이전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고, 원 정부도 이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것을 보면서 개혁의 의지를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공민왕은 즉위 후 여러 차례 개혁을 추진하며 본격적인 반원 자주 정책을 펼칩니다. 즉위 직후 우선 몽골식 변발과 몽골 옷을 입던 관습을 금지시킵니다. 또 기황후를 등에 업고 권력을 남용하며 왕권을 위협하던 기철 등의 권문세족을 제거하였죠. 나아가 권문세족 등 친원 세력을 대변하며 원나라의 간섭 기구로 사용된 정동행성 이문소를 없애버립니다. 한편, 영토 회복에도 힘을 써 병마사 유인우를 보내 원이 직접 지배하고 있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무력으로 이 지역을 되찾았습니다. 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 과정에서 이 지역의 기반을 두고 있던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이 공민왕의 고려군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또 공민왕은 그동안 사용하고 있던 원나라의 연호 사용을 중지하고, 원의 요구로 격하되어 있던 중앙 정치 기구들을 본래 고려의 형식으로 되돌렸습니다.


3. 신흥 무인 세력과 신진사대부의 성장

공민왕이 개혁을 추진하고 있던 중 1359년 홍건적이 고려로 침입해 왔습니다. 홍건적은 원나라에서 일어난 한족 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렀기에 홍건적이라 불렸습니다. 이 홍건적이 몽골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몽골에 밀려 고려로 쳐들어 온 것입니다. 고려는 이 홍건적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원과 다시 친선관계를 가질수밖에 없었고, 이로써 그동안 추진해왔던 반원 자주 정책이 일정부분 후퇴하게 됩니다.

홍건적은 1361년 2차로 고려를 침입해 왔습니다. 이때 고려는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복주(현재 경북 안동)로 피난하였습니다. 공민왕은 정세운을 고려군의 총사령관으로 삼아 홍건적에 맞서도록 합니다. 정세운은 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되찾습니다. 이때 정세운의 공을 시기한 김용이 이방실을 속여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이어 이방실 마저도 지휘관을 살해한 죄를 씌워 제거하였습니다. 김용은 이어 개경으로 돌아가던 공민왕이 흥왕사에 머무는 틈을 이용하여 공민왕을 암살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다른 무장세력의 도움으로 공민왕은 목숨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홍건적을 물리치는 과정과 공민왕 암살 미수 사건 과정 등에서 공을 세운 최영 등의 무장 세력이 대거 공신으로 책봉되어 중앙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권력집단이 됩니다. 

목숨을 지킨 공민왕은 잠시 중단된 개혁을 다시 추진해갑니다. 그러나 새로운 공신세력과 유신, 신진세력들이 서로 무리를 만들어 공민왕의 개혁에 반대하기 시작하면서 개혁이 답보상태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공민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정 주도권을 되찾아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1365년 승려 신돈을 등용하였습니다. 공민왕은 신돈에게 전권을 위임하였고, 신돈은 이를 적극 활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다시 설치하여 개혁을 추진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또 성균관을 정비하고 공민왕이 직접 시험을 주관하여 왕권을 강화시켰습니다. 이 성균관에서 공민왕이 직접 발탁한 자들이 신진사대부를 형성하여 개혁의 뒷받침 세력이 됩니다. 이때 성균관을 통해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이 정계로 진출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성장합니다. 

신돈의 거침없는 개혁으로 권문세족의 세력이 조금씩 약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정도 개혁의 성과가 나타나자 공민왕은 신돈을 더욱 신뢰하며 왕과 같이 대우하도록 명합니다. 정치 세력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으나 공민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돈을 신임하였고 신돈은 이를 이용해 개혁을 추진해 나가죠. 개혁이 잘 추진되어 가던 중 공민왕과 신돈의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한 일이 일어납니다. 신돈이 자신의 권한이 막강해진 것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고자 한것입니다. 공민왕에게 사심관 제도의 부활을 요청하고, 후에 충주로 천도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공민왕이 이 모두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이어 공민왕이 다시 친정을 선포하죠. 신돈을 배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1371년 역모로 몰아 신돈을 제거합니다.

국내 정치세력과 갈등 속에서 반원 자주 정책을 펼치던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 사망 후 자제위를 설치해 왕의 신변을 보호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제위 소속이었던 홍륜 등에게 시해당하면서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도 돌아갑니다. 

4. 고려의 멸망

공민왕이 재위하던 기간 중 1368년 중국에서는 명이 건국되어 원을 북쪽으로 밀어내면서 중원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1374년 공민왕의 뒤를 이어 이인임 등의 지지를 받은 우왕이 즉위합니다. 중국 전역을 완전히 차지한 명은 1388년 고려에 철령위 설치를 통보를 합니다. 명은 원나라의 땅은 이제 명이 차지하였으니, 원이 가지고 있던 땅은 다 명의 땅이다라고 주장하며, 철령 이북의 땅은 원의 땅이었으니 이 철령에다가 명의 병참기지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한 것입니다. 철령 이북의 땅은 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으로 공민왕이 무력으로 수복한 지역입니다. 이에 고려는 명이 억지 논리를 펴고 있다고 반발하였습니다. 우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워 요동 정벌에 반대하였죠. 그러나 당시 우왕의 지지를 받은 최영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명을 빌어 요동정벌을 단행합니다.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요동으로 출정하였죠.

그러나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다다른 고려군은 장마로 인해 불어난 강물로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되자 여러 차례 회군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청이 번번이 거절되자, 이성계는 조민수를 설득하여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하였습니다. 개경으로 빠르게 돌아온 이성계는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시킵니다. 그리고 권력을 장악하였죠. 이후 이성계와 조민수 간의 권력 다툼 속에 창왕과 공양왕이 즉위하였으나, 신진사대부의 지지를 얻은 이성계가 공양왕을 폐위시킨 후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 소리로 복습하는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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