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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능검 무료강의

백제의 주요 왕 계보 정리

by 코택유 2023.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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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강의ㅣ핵심만 잡아낸 한국사

 

 


★★오늘 배울 내용의 핵심

1. 백제는 한성시대, 웅진시대, 사비시대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좋다.
2. 한성시대 주요 국왕은 고이왕, 근초고왕, 개로왕이다.
3. 웅진시대 주요 국왕은 무령왕이다.
4. 사비시대 주요 국왕은 성왕, 의자왕이다. 

읽는 강의ㅣ풀어쓴 한국사

 

한성시대의 주요 국왕

고이왕:  백제 제8대 왕입니다. 백제가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를 갖추는데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고이왕은 즉위하고 가장 먼저 군사권을 장악합니다. 240년 좌장을 설치하여 병마권을 자신에게 귀속시킵니다. 이는 귀족들의 군사권이 약화되고 결국 독자적 자치권이 사라져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왕권은 강화되는 것이죠. 고이왕은 260년에 6좌평 16관등제를 실시합니다. 또 관등에 따라 관복의 색깔을 달리하는 관복제를 정하였죠. 이러한 개혁을 통해 고이왕은 기존의 족장세력을 자신의 밑으로 서열화 하며 최고권력자로 입지를 다집니다. 외교적으로도 목지국과 경쟁에서 승리하여 마한 지역의 맹주로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근초고왕: 백제 제13대 왕입니다. 고구려를 공격하여 제압한 백제의 왕이기도 합니다. 근초고왕은 진씨 일가에서 왕비를 맞이하여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만듭니다. 왕위 부자 상속을 확립해 왕권을 강화시켰습니다. 담로제를 실시해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죠. 고이왕 때부터 내려온 관등제를 보다 정비하여 강력한 왕권을 만들어냅니다. 국내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근초고왕은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수행합니다. 마한의 지역에 독자적 세력으로 남아 있던 국가들을 복속하고, 가야지역에까지 진출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고구려가 남쪽으로 내려올 시도를 지속하자 371년에는 3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습니다. 고구려 공격으로 백제는 낙랑군과 대방군이 있던 지역 일부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서해를 끼고 있는 지형을 활용해 적극적인 해상활동을 전개하면서 서해와 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서해를 통해  중국에 직접 진출하였는데, 중국왕조와 국교 수립을 추진하면서 남조의 동진과 우호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리하여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 영낙랑태수로 책봉됩니다. 또 중국 요서 지방으로도 진출하여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거점을 마련하였습니다. 남해를 통해 일본 규슈 등에도 진출하면서 선진 문물을 전파하였습니다. 아직기와 왕인이 근초고왕 당시 일본으로 넘어간 학자로,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였습니다. 근초고왕이 에게 칠지도를 하사할 정도로 일본과 백제의 관계가 긴밀해졌습니다. 대내적 정치 안정과 대외적 확장을 통해 백제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근초고왕은 대내외적 치적을 통해  왕의 정통성과 왕권강화의 당위성을 밝히려는 목적에서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서기」라는 역사책을 편찬하도록 합니다. 

침류왕: 백제의 제15대왕입니다. 근초고왕 때 동진과 수교한 이후 동진으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용하였습니다. 침류왕 때 이르러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여 공인하였습니다.

개로왕: 백제 제21대 왕입니다. 개로왕은 즉위 후 왕족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노력합니다.  당시 진씨,  해씨 등 11개의 성을 가진 유력귀족들을 정치에서 배제하고, 좌현왕과 우현왕이라는 새로운 관직을 설치하고 왕족을 임명한 후 군사권을 부여하였습니다. 귀족의 군사권을 약화시키는 조치였죠. 또 일반 백성들에 대한 통치도 강화하였습니다. 개로왕은 나제동맹을 단단히 다지면서 고구려의 위협에 대비하였으며, 또 왜에 동생 곤지를 파견하여 우호관계를 다졌습니다. 중국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자세로 가졌는데, 특히 고구려 배후에 있는 북위와 관계를 다지고자 조공을 바치면서, 고구려가 백제를 자주 침략한다며 함께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북위가 거절하자 개로왕은 북위에 바치던 조공을 끊어버렸습니다. 이를 알게 된 고구려는 승려 도림을 첩자를 보내 개로왕에게 접근하게 하였습니다. 도림은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이를 이용하여 환심을 얻었고, 개로왕의 왕권강화에 대한 집념을 이용하여 한 왕궁과 왕릉 건설, 성곽 수리, 한강변 둑 공사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도록 부추겼습니다. 개로왕은 이것이 모두 왕의 권한과 지위를 높여준다고 판단하여 도림의 의견을 받아들여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켰죠. 결국 왕권이 강화되는 것에 달가워 하지 않던 귀족들의 불만과, 대토목 공사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불안과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이 틈을 이용해 고구려 장수왕은 군사 3만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를 막지 못한 개로왕은 몸을 피하다가 결국 백제 출신의 고구려 장수 재증걸루에서 사로잡혀 아차산에서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으로 백제는 수많은 난민이 생겨나 대거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한성은 수도로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였습니다.


웅진시대의 주요 국왕

문주왕: 개로왕의 아들로 백제 제22대 왕입니다.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대대적으로 공격해 왔을 때 신라에 원병 요청을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문주왕은 신라가 보내준 1만의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으나, 이미 한성은 함락되고 개로왕은 처형당하고, 수도 한성은 쑥대밭이 되었으며 수많은 난민이 발생한 뒤였죠. 왕위에 오른 문주왕은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요새였던 웅진을 새 수도로 정하고 전후 복구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성에서 남쪽으로 이주해온 세력과 본래 있던 토착 세력 간의 갈등이 일어났고, 국가 운영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었습니다. 두 세력의 갈등 속에서 왕권이 약화되었죠. 문주왕은 다시 왕권을 강화시키려 시도하다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한성에서 함께 이주해온 측근세력이 보낸 자객에 의해 왕위에 오른지 3년 만에 피살되었습니다.

무령왕: 백제의 제25대 왕입니다. 즉위 후 일어난 백가의 난을 진압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신진세력을 등용하면서, 옛 귀족세력과 힘의 균형을 맞추고자 힘썼습니다. 전국에 22개의 담로를 설치하고 그곳에 왕족을 파견하면서도, 지방에 대한 통제 역시 강화시켰습니다. 무령왕 시기에 자연재해가 많았습니다.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자, 무령왕은 이들을 새로운 곳에 정착시켜 농사를 짓게 하는 등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였죠. 이를 통해 민생 안정과 조세 수취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왕권이 강화되고 사회 혼란이 수습되면서 내부 통치질서가 안정되자, 무령왕은 적극적으로 대외정책을 실시합니다. 먼저 빼앗긴 한성을 회복하기 위한 복수전을 시작해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지속적으로 한강유역을 탈환을 위해 고구려를 공격하는 한편, 섬진강 유역으로도 진출하면서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였습니다.  내부의 안정과 정열적 팽창으로 백제는 다시금 자신감을 얻게되었고, 곧바로 중국과 우호관계 수립에 박차를 가합니다. 이 무렵 중국 남쪽에서는 동진의 뒤를 이어 송과 제를 지나 양나라가 세워졌는데, 무령왕은 이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고, 양으로부터 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에 책봉되었습니다.  백제와 양나라 간의 우호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가 있습니다. 바로 무령왕릉입니다. 무령왕릉은 벽돌로 만들어진 무덤인데, 이 벽돌무덤은 당시 중국 양나라에서 유행하던 무덤양식입니다. 이를 통해 백제가 중국의 양과 교류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으며, 양을 통해 선진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사비시대의 주요 국왕과 백제의 멸망

성왕:  백제 제26대 왕으로, 무령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명농입니다. 아버지 무령왕이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 즉위한 성왕은 백제가 다시 융성하여지면서 왕권 강화, 통치의 효율성 제고, 늘어난 인구의 수용 등의 이유로   538년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꿉니다. 이때부터 사비시대라고 합니다. 성왕은 새롭게 자리 잡은 수도를 5개의 부로 구분하고, 중앙에 행정실무 기관인 22부 관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무령왕 때 실시된 지방의 22담로제를 5방으로 개편하였죠. 이 5방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 집권력을 한층 강화하였습니다. 성왕은 부왕의 외교정책을 계승하여 중국 양과 우호관계를 지속해 나갑니다. 그래서 양으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군사 수동장군백제왕으로 책봉 받죠. 성왕은 적극 왕권 강화를 위해 불교를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특히 겸익이 인도에서 불교를 공부한 후 귀국하자 성왕은 그를 흥륜사에 두어 불교 연구를 지원하였습니다. 국내정치와 사회가 안정화 되자 성왕은 중국뿐만 아니라 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오경박사와 기술자들을 파견하기도 하였습니다. 552년 노리사치계를 왜에 보내 불교를 직접 전해주었습니다. 한편 백제는 무령왕 때부터 줄기차게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성 회복을 노렸으나, 번번이 실패하였습니다. 성왕 역시 부왕의 외교방책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고구려에서 왕위 계승 전이 발생하면서 내분의 소용돌이에 빠졌습니다. 이에 성왕은 나제동맹을 강화하면서, 신라 진흥왕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결의하고, 여기서 승리할 경우 한강 상류지역은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은 백제가 차지하기로 하였습니다. 551년 나제연합군은 한강유역 공격하였고, 결국  한성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약속대로 백제는 한강하류지역을 다스리가, 신라는 한강 상류 지역을 다스리고 했습니다.  그러나 533년 신라군이 한강 하류의 백제국을 기습하여 점령한 후 이 곳에 신주를 설치하였습니다. 분노한 성왕은 곧바로 신라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554년 관산성 전투에 백제군 3만여 명이 대패하였고, 성왕도 전사하였습니다. 

의자왕: 백제의 제31대 왕이자, 마지막 왕입니다. 무왕의 장자로 즉위한 의자왕은 즉위 이후 안정된 왕권을 기반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왕권을 지속적으로 강화시키는 한편, 전국을 시찰하며 백성들을 위로하기도 하였죠. 대외적으로는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면서, 장군 윤충을 보내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이는 신라에게 매우 큰 위협이었습니다. 신라는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였고, 이후 당에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이를 알게 된 의자왕은 고구려와 동맹을 맺으며 우호 관계를 수립합니다. 고구려-백제-왜 대  당-신라의 십자형 외교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해오자 의자왕은 계백에게 결사대 5천을 주어 신라에 맞서도록 하였습니다. 계백은 황산벌판에서 진을 치고 김유신의 신라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였습니다.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도피하였으나 곧 포로가 되었고, 백제는 멸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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