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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능검 무료강의

고구려의 왕권 강화 과정

by 코택유 2023.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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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강의ㅣ핵심만 잡아낸 한국사

 

 


★★오늘 배울 내용의 핵심

1. 고구려의 본격적 발전은 태조왕, 고국천왕, 미천왕 때이다.
2. 고구려의 위기는 고국원왕이며, 이를 수습한 왕은 소수림왕이다.
3. 고구려의 전성기는 광개토왕, 장수왕이다.

 


읽는 강의ㅣ풀어쓴 한국사


고구려의 본격적인 발전이 시작되다

태조왕: 고구려 제6대 왕입니다. 태조왕이 비록 고구려를 건국한 인물은 아니지만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시점의 인물로 잡습니다. 태조왕은 그동안 압록강 유역으로 한정되어 있던 고구려의 영역을 본격적으로 넓히기 시작하였습니다. 압록강 중상류에 있던 여러 정치집단을 복속시키면서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이어받도록 하면서 왕권을 강화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활발하게 정복활동을 전개합니다. 동쪽으로 진출하여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공납을 바치던 옥저를 정복하였습니다. 또 요동군과 낙랑군을 공격하면서 청천강 상류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왕의 시호가 태조라는 것을 통해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 태조왕 시기를 고구려가 괄목할만한 성장이 이루어지는 전환기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국천왕: 고구려 제9대 왕입니다. 왕위 계승의 방식을 부자 상속으로 바꿔 보다 강한 왕권을 안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왕후의 친척 세력 중 어비류와 좌가려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왕권 강화책을 시행합니다. 부족 연맹의 성격을 띄고 있던 5부를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하였습니다. 또 진대법을 실시하여 빈민들을 구휼하면서 사회적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죠. 

미천왕: 고구려 제15대 왕입니다. 을불(미천왕의 본래이름)은 직전 왕이자 폭군이었던 봉상왕의 견제와 압박을 피해 머슴살이와 소금장수 등을 하며 숨어 살았습니다. 국상 창조리 등이 봉상왕의 폭정을 견디다 못해 왕위에서 내쫒고 숨어 지내던 을불을 찾아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미천왕 재위 당시 중국에는 서진이라는 나라가 무너지면서 여러나라가 난립하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이틈을 노려 미천왕은 적극적인 영토 확장 정책을 실시합니다. 미천왕은 우선 요동지방으로 진출을 꾀해 서안평 지역을 확보하였습니다. 또 중국과 연결이 끊긴 낙랑군과 대방군을 차례로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한사군 세력(=중국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요동지방으로 진출하면서 요동을 노리는 또다른 세력이었던 선비족의 일파인 모용부와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의 위기와 재정비

고국원왕: 고구려 제16대 왕입니다. 미천왕의 아들로, 즉위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요동 진출을 추진하였습니다. 미천왕때부터 시작된 선비족 모용부와 대립에서 처음에는 고구려가 우위에 있었습니다. 모용부가 전연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342년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고구려는 이를 막지 못하였습니다. 전연은 미천왕의 무덤이 도굴해 미천왕의 시신을 가져갔으며, 왕의 어머니와 왕비 등 5만 여 명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352년 전연이 중국의 북동부 지역을 장악하고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면서 고구려를 압박해오자, 조공책봉관계를 체결하였습니다. 370년 강성할 것 같던 전연이 전진에게 멸망당하자 고구려는 전진과 우호관계를 맺고 서쪽 국경을 안정시켰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한반도 남부로 기수를 돌려 진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백제를 두 차례 침입하였으나 참패하였고, 371년 겨울에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을 공격해왔습니다. 고국원왕은 평양성에서 이를 막다 전사하였습니다. 

소수림왕: 고구려 제17대 왕입니다. 고국원왕의 아들로,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자 뒤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국왕이 전사한 전래 없는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대외 진출 정책을 중단하고 때마침 중국 북쪽을 장악한 전진과 우호관계를 맺어 중국쪽 외교와 국방을 안정시켰습니다. 외교와 국방의 안정으로 문화적 교류가 확대되었고, 전진으로부터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습니다. 372년 태학을 설립하여 우수한 인재를 양성에 노력하였고 373년에는 율령을 반포하여 통치의 혼란을 막고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이 기간에 전진을 통해 불교를 수용하여 새로운 국가 이념으로 삼고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소수림왕의 노력으로 국내 정세가 안정되면서 중앙집권 체제가 한층 강화되었고, 이에 다시 백제를 압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고구려,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다

광개토왕: 고구려의 제 19대 왕이며, 이름은 담덕입니다. 광개토왕은 18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후 소수림왕이 이루어 낸 정치적 개혁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칩니다. 즉위 후 백제 공격을 시작으로 영토개척 작업을 시작합니다. 서쪽으로는 전연의 뒤를 이어 건국한 선비족의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 지역을 차지하였습니다. 또 동북쪽으로 진출하면서 숙신이라는 민족을 복속시켰습니다. 그리고 당시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동부여를 정벌하였습니다. 남쪽으로는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 한성을 포위하여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백제와 친선관계를 가지고 있던 왜가 신라를 공겨하자, 신라의 내물마립간은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광개토왕은 5만의 군사를 신라에 보내 왜를 몰아내었고, 신라의 내정에 관여하면서 복속국으로 삼았습니다. 참고로 이때 고구려군이 신라에 들어와 왜군을 물리치면서 상주하였던 사실을 알려주는 유물이 있습니다. 바로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호우명 그릇입니다. 호우명 그릇 뒷면에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다시 돌아와 고구려군은 왜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가야까지 추격하여 군사작전을 펼쳤고, 당시 가야 연맹의 맹주였던 김해 금관가야가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서 쇠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빈자리를 내륙지역에 위치해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고령의 대가야가 차지하여 새로운 맹주로 떠올랐습니다. 한편, 광개토왕은 한국사 최초로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연호란 국왕이 새로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삼는 칭호입니다. 오직 황제만 사용한 용어인데, 당시 황제라는 칭호는 중국에서만 사용한 것을 생각해본다면, 광개토왕의 연호 사용은 중국과 대등한 입장의 독자적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수왕: 고구려 제20대 왕으로, 이름은 거련입니다. 장수왕의 시호처럼 꽤 오래 산 인물이죠. 재위기간이 80년에 이릅니다. 장수왕은 427년 도읍을 평양으로 옮깁니다. 평양은 고조선 멸망 이후 낙랑군이 있던 지역으로 중국 선진 문화가 있던 곳입니다. 미천왕 때 복속 된 이후 고구려는 평양을 매우 중요하게 인식하고 관리하였는데, 장수왕 때 이르러 이곳을 도읍을 삼았던 것입니다.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로 확장된 국가를 운영하기에 국내성의 규모와 인프라 기반이 약하다는 것, 앞서 살펴본대로 평양이 문화적으로 선진적인 곳이었다는 것, 귀족세력의 견제로 보다 강력한 왕권의 실현을 하기 부담이 되었다는 것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한편 장수왕은 외교 분야에서 상당한 수완능력을 보여줍니다. 당시 중국이 남송과 북위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장수왕은 중국의 정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북위와 남송 모두와 조공책봉관계를 맺으면서 등거리 외교를 전개합니다. 북위와 남송에 각각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것이었죠.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그들의 책봉은 형식상이었고, 북위에 대해서 군사적 활동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 고구려였습니다. 장수왕은 조공이라는 형식을 빌어 중국쪽 즉, 서북방 국경을 안정시켰습니다. 이어 남쪽으로 기수를 틀어 이제 백제를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고구려와 일진일퇴를 거듭했던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 천도에 예민하게 반응하였습니다. 백제의 비유왕은 신라의 눌지마립간과 동맹을 맺어 공동으로 대응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즉위한 개로왕은 나제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 북위를 이용하여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견제를 시도하였습니다. 개로왕은 북위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개로왕의 외교적 오판이었습니다. 당시 북위의 입장에서는 중국에서 남송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와 전면전을 벌일만큼 여유가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고구려와 사안에 따라 일시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죠. 결국 북위는 백제의 청병사실을 고구려에 알립니다. 장수왕은 크게 분노하여 백제를 공격할 준비를 합니다. 고구려가 백제보다 우세했다고는 하나 백제 역시 무시할만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장수왕은 우선 백제의 내부를 흔들어 놓은 뒤 공격하기로 정합니다. 당시 개로왕이 바둑을 매우 좋아했는데, 이를 알게 된 장수왕은 바둑의 고수이면서도 승려인 도림이라는 인물을 백제에 보냈습니다. 승려 도림은 개로왕을 만나 바둑을 두면서 개로왕의 환심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삼국이 모두 불교를 수용한 것을 생각해본다면, 개로왕이 승려 도림을 환대하며 극진히 대우하였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죠. 개로왕의 환심을 얻은 승려 도림은 개로왕에게 자신이 살펴본 백제의 약화된 왕권과 국정 운영의 비효율성을 말하며 강력한 왕권 확립을 위한 궁궐 건축, 왕릉 조성 등을 언급합니다. 강력한 왕권을 만들고 싶어 했던 개로왕은 곧바로 실행에 옮깁니다. 이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왕권이 강화되는 것에 불만이 많았던 귀족들의 반감이 커지면서 협조를 얻기 힘들어졌고, 궁궐 공사 등에 동원된 백성들 불만또한 커지면서 민심을 잃어갔습니다. 장수왕은 이틈을 노려 475년 3만의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였습니다. 개로왕은 곧바로 태자를 신라에 보내 원병을 요청하면서 고구려 공격에 대응하였으나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고구려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였습니다. 결국 신라군이 오기도 전에 한성이 함락되었 개로왕은 아차산에서 고구려 군사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백제는 수도 한성이 함락되면서 웅진으로 천도하였습니다. 장수왕은 다시 공세를 강화하면서 남쪽으로 더 진출하여, 남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충주에 이르러 충주고구려비를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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